히라누마 쓰도무

윤 황

 필자 윤 황 전 파주시 교육장은 안성시 금광면 한운리에서 태어나 금광국민학교, 현 금광초등학교에 1941년 입학해 1945년 해방 될 때까지 몸으로 부딪치며 겪었던 일본제국주의의 황국신민교육 과정과 나라를 빼앗긴 국민이 겪어야 했던 고통스러운 생활상황을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밝힌 귀중한 글이다.

 윤 황 전 교육장은 안법중학교와 고려대학원 교육대학원 졸업한 뒤 교육발전의 의지를 갖고 19771020일 교양시교육청, 성남시교육청 장학사와 이어 광릉초등학교 교장, 안양시교육청 학무국장을 거쳐 199831일 파주시교육청 교육장에취임, 사도정신을 발휘해 후학 양성에 힘쓴 훌륭한 참 스승이다.

 윤 황 전 교육장은 교육발전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해 헌신한 공로로 전국 현장교육연구 우수상, 국민교육헌장 선포기념 유공자표창, 교단중심 학교경영 공로표창, 교육발전 유공표창과 경기 사도대상을 받았다.

 본지는 제 73주년 광복절을 맞아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이글을 싣는다. (편집자 )

히라누마 쓰도무

 

윤 황(전 파주시교육장)

나의 일본식 이름

히라누마 쓰도무

한자로는 平沼務


 이것은 내가 고꾸밍각고 고넨세이(국민학교 5학년, 1945) 우리민족이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날 때까지 학교에 가면 센세이가(선생님이) 그리고 반 학생 친구들이 부르던 나의 이름이었다.

 일본이 일본식으로 지어준 나의 일본 이름 그런데 집에만 오면 아이구 우리 황이왔구나. 누릉갱이 한 쪽 남겨 놨다.” 하시며 할머니가 반갑게 불러주시던 내 이름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우리 식구 모두가 그리고 우리 동네사람들이 불러주던 나의 이름은 황이였다.

 아버지가 호적에 올린 나의 이름은 尹璜(윤황)’이고 성을 빼고 이름 한자만을 귀엽게 불러줄 때의 나의 이름은 황이였다나를 부르는 이름이 집에서는 황이학교에 가면 히라누마 쓰도무나는 혼란했다. 그 어린 시절에도.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조선 사람인가? 일본 사람인가?

 

황국신민(皇國臣民)교육 

 나는 쇼와 주 로꾸넹 상가쓰(昭和 163, 19413) 손가락 세는 시험에 합격해서 깅꼬고꾸밍각고(금광국민학교 -경기도 안성군 금광면 소재) 1학년에 입학했다.

 학교에서 가장 먼저 가르쳐 준 것은 센세이(선생님), 교시쓰(교실) 등의 일본말 그리고 일본글자 가나명함을 세로로 쪼갠 크기만 한 나무 판에 학생들 이름표를 만들어서 교실 앞쪽 벽 표에 한 줄로 걸어 놓고 일본말을 열심히 하는 학생은 이름표를 한 단계 씩 올려 달아주며 학생들이 일본말을 열심히 쓰도록 가르쳤다. 우리는 일본말을 쓰는 일본사람이 되어 갔다.

 우리 동네(안성군 금광면 한운리 하동)에서 학교까지는 먼 십리(6km) 1주일에 한 한 번은 학생들이 동네 어귀에 모여 한 줄로 줄맞춰 학교까지 갔다.

 6학년 대장의 구령에 따라 발을 맞춰 걷다가 대장이 궁깡 고우징 고구(군함행진곡)”하면 우리들은 맘모루모 세메루모 구로가네노(방어도 공격도 강철로 만든), 우까베루 시 로조 다노미나루(떠 있는 성이라도 믿음직하다.)”하고 일본 군가를 부르며 발을 맞춰 갔다.

 대장이 가께아시(달려가기)” 하면 줄 맞춰 달려갔다. 모두가 맨발로. 교문에는 완장을 두른 학생들이 줄 잘 서서 들어오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 이것이 군사훈련의 연장이 아니었을까?

 길가 시들어진 잡초 위에 서리가 하얗고 길바닥이 얼어 갈라진 초겨울 어느 날 그토록 추웠던 아침 양말도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학교까지 쉬지 않고 달려갔던 날. 발이 시린 건지 발바닥이 아픈 건지 분간을 할 수 없었던 그때의 고통 지금의 학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면 곧이들을까? 털양말 방한화 왜 신지 않고 맨발로 갔느냐고 핀잔이나 주지 않을까?

 학년이 올라가면서 이상한 것을 외우라고 했다. ‘아마데라스 오오미가미’ ‘진무덴노’ ‘스이제이덴노...’ ‘아마데라스 오오미가미는 일본 황실이 숭배하는 최고의 조상신 진무덴노는 일본의 제1대 덴노(천황·) 일본의 제1덴노부터 124대 쇼와덴노까지 모두 외우라는 것. 이렇게 외우는 과정에서 일본의 덴노(천황·)는 곧 우리들의 덴노가 되어 갔고 우리는 덴노헤이까(천황폐하)를 섬기는 충성스런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되어갔다.

 매일 아침 조회 때에는 세 가지가 빠지지 않았는데 먼저 기미가요(일본 국가)’ 노래를 부르기 다음은 다이도아 센소(대동아전쟁,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승전소식을 알리는 뉴스오 시라세루(뉴스를 알리겠다)” 세 번째는 일본의 승전을 축하하는 덴노헤이까 반사이(천황페하 만세)” 이런 조회를 통해서 일본이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는 소식이 기다려졌다.

 나도 일본사람이 되어가는 것이었다. 내가 3학년이 되던 3월 어느 날 싱가포르 간라꾸!!(싱가포르 함락)” “덴노헤이까 반사이(천항폐하만세)” “다이닙뽕 반사이(대 일본 반세)”를 수 없이 외쳐 대며 일장기(일본 국기)를 흔드는 축하행사가 있었다.

 영국이 지배하던 싱가포르에서 영국군 사령관이 일본군에게 항복 하고 싱가포르를 우리 일본군이 뺏어서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책가방 없이 행사로 하루를 보냈는데 이날 학교에서는 떡도 주고 돼지 오줌보 비슷한 고무공도 선물도 주었다. 기분이 좋았다. 분명 나도 우리나라 일본이 이겨서 기분이 좋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나도 어지간히 황국신민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 아니었을까?

 모내기철이 되어도 농촌에는 일할 사람이 없었다. 청년들은 모두 다 일본군에 끌려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꾸밍각고(국민학교) 3학년 이상 모든 학생은 날마다 모를 심으러 다녔다.

  하루 종일 논바닥에 꾸부려서 모를 심다 보면 허리가 끊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이 고통에 하나 더 보태서 다리에는 거머리가 붙어서 피를 빨아먹었다. 거머리가 징그럽고 하도 무서워서 허리가 아무리 아파도 거머리가 다리에 붙지 못하도록 다리를 쉴 새 없이 움직여 거머리를 좇아야만 했다. 그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는지?

 말라리아 걸린 학생은 아픈 핑계로 학교도 빠지고 모내기에 안 나갔다. 말라리아는 낮에 낮잠 잘 때 모기가 물면 걸린다고 하기에 나도 말라리아 걸려서 모내기 안 가려고 집 뒤 굴뚝 옆 그늘진 곳에 가마니를 깔고 누어서 말라리아모기가 와서 물으라고 일부러 낮잠을 청한 적도 있다.

 간간히 장정들이 일본군대에 새로 나가는 출정식이 있는 날이면 전교생이 면사무소 앞에 나가 길게 줄을 서서 "덴노헤이까 반사이(천황폐하 만세)"를 웨치며 일장기를 흔들었다. 여학생들은 무인(군인)으로서 운이 오래 가라는 뜻의 무운장구(武運長久) 글자가 쓰인 천에 1,000명이 돌아가며 한 땀 한 땀 수를 놓아 새긴 센닝바리(1000명의 바느질)를 장정의 목에 걸어 주며 덴노헤이까 반사이(천황폐하 만세)’외쳤다.

 청년들은 군대로만 끌려가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살던 집에서 왼쪽으로 산모퉁이를 돌아서 150m 쯤 가면 김자옥이라는 청년이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징용으로 끌려갔다고 들었다. 징용이 무엇인지는 몰랐어도 일본 놈들이 사람을 강제로 끌고 간다는 생각에 두려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 김자옥 청년은 지금가지도 돌아왔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어느 늦은 봄 월요일 학교에 갔더니 학교에서 똥냄새가 진동을 하였다. 살펴보니 운동장이 모두 갈아엎어져 있었다. 그리고 똥이 잔뜩 뿌려져 있었다. 얼마 지나서 그 곳은 다시 갈아 둔덕을 만들고 고구마를 심었다. 운동장이 고구마 밭으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체육시간이 되면 괭이 곡괭이 삽 들고 개울가로 나가서 임자 없는 땅에 따비(밭을 만드는 일)를 이루었다. 그리고 들깨를 심어 가꾸는 일도 하고 때로는 150m가 넘는다는 비탈진 학교 앞산(금강산 金剛山) 꼭대기까지 올라갔다오기를 시켰다. 운동장은 일본에서 광복(光復)된 후 다시 만들어졌다.

 수시로 학생들에게 내주는 숙제도 전쟁숙제였다. 광솔 따오기, 가마니 쳐오기, 놋그릇 가져오기, 쇠붙이 가져오기. 솔방울 따오기. 댕댕이넝쿨 잘라오기...

 광솔은 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의 가지나 옹이를 말하는데 기름을 내서 군수공장으로 보낸다 하고, 가마니는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도치카를 만들어 총알을 막는데 쓴다 하고, 놋그릇은 총알 만드는데 쓴다고 하고, 쇠붙이는 총이나 대포 군함을 만드는데 쓴다고 하고, 솔방울은 교실에서 난로에 땔 거라 하고, 댕댕이 넝쿨은 전쟁에 쓰이는 천을 만드는데 쓴다고 했다.

 이 모두가 일본의 전쟁준비였다. 우리는 공부를 하러 학교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전쟁 준비에 이용만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놈들이 그 토록 우리를 일본사람으로 만들려고 했어도 은연중에 일본인에 대한 반감도 자라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일본인 미야다(宮田) 교장을 놀려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3학년 때의 일이다. 미야다 교장이 교실을 넘겨다보며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는데 반 동부 두 사람과 일본 교장 놀려주자고 짜고 미야다 교장 뒤로 바짝 가서 무시 무시(벌레 벌레)’하며 등어리를 주먹으로 탁탁 치고 반대방향으로 뛰어 도망간 적이 있었다.

 또 한 번은 4학년이었던 늦가을 어느 날 학생들이 실습지에 가꿔놓은 조선무우를 캐는 작업을 했었는데 일본인 미야다 교장이 이 작업을 지켜보다가 자리를 뜨고 있었다. 이때 내가 느닷없이 니혼징와 니홍고 쓰가우시 조센징와 조셍고오 쓰까우노데스요!’라고 했다. 이 말은 일본사람은 일본말을 쓰고 조선 사람은 조선말을 쓰는 것이야!’ 라는 말이었다. 그랬더니 저만큼 가던 미아다 교장이 이 소리를 들었는지 확 돌아서서 다레까 다레(누구야 누구)” “다레까 다레(누구야 누구)”를 연발하면서 입에 거품을 품고 쫓아 왔다.

 ‘조선 사람은 조선말을 쓰는 것이라고 하는 말이 일본인 교장에게는 일본의 한국통치에 저항하는 구호로 들렸을 것이다. 모두가 작업을 하던 중에 한 구석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 학생들도 누가 그랬는지는 지는 잘 몰랐을 것이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무를 캐는 데만 열중한 척했다. 아무도 이름을 대지 않고 하던 일만 계속하니까 미야다 교장은 머쓱하니 있다가 그냥 갔다. 오랜 후에 생각하니 아찔한 순간이었다.


배고픔

 어머니는 내가 학교에 갈 때마다 벤또(알루미늄 도시락)를 싸 주셨다. 도시락에는 꽁보리밥에 고추장을 담은 종지를 박아 주셨다. 학교공부가 끝나면 빈 도시락을 책과 함께 보자기에 꼭꼭 싸서 어깨 뒤에 대각선으로 질끈 묶고 집으로 왔다. 그럴 때면 발자국을 뗄 때마다 빈 도시락 안에서 고추장종지가 덜거덕 댔다. 그러다 장난치느라고 뛰기라도 할 땐 그 덜거덕 소리가 요란했다.

 집으로 올 때는 무척 배가 고팠다. 그래서 봄이면 길 옆 산으로 가서 진달래꽃을 따 먹을 때도 있었고 초여름이 되면 길 가에 있는 아카시아 나무 가지를 휘어서 아카시아 꽃을 따 먹으며 허기를 달랠 때도 있었다학교에 가지 않는 날 동네 아이들은 산에 가서 칡뿌리를 캐다가 질겅질겅 씹어 빨아 먹기도 했고 소나무 겉껍질을 베껴 내고 하얀 속껍질을 벗겨 씹어 먹기도 했다.

 그 시절 쌀밥은 먹어본 적이 없다. 오직 꽁보리밥이었다. 아침 밥상에 할아버지와 아버지 진지에만 보리밥 위에 쌀밥이 한 숟갈 정도 얹혀 있었다. 여름에는 옥수수로 점심을 때울 때도 있었고 감자나 고구마만 먹고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가꿔 놓으신 참외밭에서 참외만 따 먹고 점심을 때운 날은 저녁때가 되면 몸이 휘지고 어질어질 하였다. 간간히 조밥을 해 주실 때도 있었고 수수밥을 먹을 때도 있었다.

 집안 식구 모두가 아침 점심 저녁 세끼 밥을 먹는 것이 아니었다. 아침에는 얄팍하게라도 밥 한 사발씩에 고추장 짠지(김치) 반찬으로 먹고, 점심에는 넓은 양푼(알루미늄 그릇)시래기, 김치깍두기, 고추장 등 푸성귀 반찬을 듬뿍 넣고 여기에 꽁보리밥 한 사발을 얹어 화롯불에 데우며 비비면 집에 있는 식구모두 달려들어 나눠 먹기도 하였다. 그리고 물을 많이 마셨다. 채소 와 물로 배를 채운 셈이었다.

 저녁에는 커다란 솥에 시래기 등 나물을 잔뜩 넣고 보리쌀 약간 넣고 멀건 죽을 쑤어서 온 식구가 나눠 먹기도 했다. 먹고 나서 잠깐은 배가 부른듯한데 조금만 지나면 바로 배가 푹 꺼졌다.

 가장 배가 고픈 달은 56, 보리를 타작해서 보리쌀이 나오기 전까지 식량이 없었다. 배가 하도 고파서 이시기를 넘기는 것이 높은 산 고개 넘어가는 것보다 힘이 든다고 해서 이 시기를 보릿고개라고 했다.

 이 시기에 산과 들에 풀이 어느 정도 자라면 할머니 어머니 작은어머니가 함께 산에 가서 무릇을 여러 바구니 캐 오신다. 무릇은 마치 마늘처럼 생겼는데 잎 길이가 마늘잎보다 짧고 좀 넓적한데 뿌리 쪽이 좀 붉은 색 도는 풀.

 캐온 무릇은 삶아서 우물가 커다란 자박지(넓은 도기)에 물을 붓고 삶은 무릇을 담가 놓았다. 무릇을 삶아서 물에 담가 놓아야 독이 빠진다고 했다. 며칠 있다가 이것을 건져 짜서 묻혀 먹었다. 이것은 나물 반찬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밥 대신으로 먹는 식량이었다. 이렇게 해서 보릿고개를 넘겼다.

 왜 이렇게 먹을 것이 없었던가? 대부분의 식량을 공출했기 때문이었다. 공출이란 벼나 가마니 등의 물자를 일본정부에 받치는 것을 말한다. 지난 가을에 농사지어서 거둬들인 벼는 거의 일본정부에 공출로 받쳐서 우리가 먹을 곡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제 말기에는 벼를 거의 다 빼앗긴 우리에게 만주에서 콩기름 짜고 남은 콩깻묵을 갖다 나눠주고 먹으라고 한 적도 있다. 공출은 벼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 집 세집 건너 윤승선(고인)네 집에서 윤승선 할머니가 누에고치로 명주실을 뽑고 입었는데 면서기가 들이닥쳐 명주실 뽑는 틀을 발로 밟아 망가뜨렸다고 들었다. 이유는 누에고치를 나라에 공출 하지 않고 실을 뽑았다는 것이었다.

 초겨울이 되면 집집마다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초가지붕을 씌운다. 그런데 일제 말기에 한 집이 이엉을 엮어 지붕에 씌웠다고 면서기가 달려와서 지붕에 씌운 이영을 당장 볏겨 내리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유는 가마니를 짜서 공출할 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씌웠기 때문.

 

헐벗음

 가을이 되면 어머니는 목화를 따서 말렸다. 말린 목화를 씨아(목화씨 빼는 틀)에 대고 손잡이를 돌리면 목화씨는 앞으로 빠지고 다져진 솜이 뒤로 빠져 떨어졌다. 이 다져진 솜을 왕골로 엮은 자리에 펼쳐 놓고 싸리가지를 엮어서 만든 채로 톡톡톡톡 두드리면 솜이 부드럽게 피어올랐다.

 이 부드러운 솜을 떼어 굵고 흰 초 모양의 고치를 만들고 이 고치 끝 솜을 가늘게 뽑아 돌려 밑실을 만들어 이 밑실을 괴머리기둥에 달아 놓은 가락이라는 쇠꼬챙이에 맨 다음 오른 쪽으로 꼭지마리(손잡이)를 돌리면 물렛줄에 연결된 가락이 빠른 속도로 돌아가고 왼손에 잡고 있는 고치를 살살 올리면 고치 끝의 솜이 가늘게 꽈지며 실이 자아졌다.

 실을 약 40cm 정도 자아 올렸다가 꼭지마리(손잡이)를 반대로 돌려 뽑아 올린 실을 아래에 있는 가락(쇠꼬챙이)에 감는 동안 물레가 돌아갈 때마다 나는 소리는 위영 위영 위이이이영’, ‘위영 위영 위이이이영’...할머니가 돌리는 이 물레소리는 하루 종일, 그리고 몇 달 동안 이어졌다. 할머니 팔이 얼마나 아팠을까?

 이 실로 무명천을 짜기 위해서는 약 60cm의 막대기에 약 20m의 길이의 실을 약 0,5cm의 간격으로 매서 날실을 길게 늘여 놓은 다음 이 날실에 풀칠을 해서 빳빳하게 말린다. 120줄이 넘는 말린 실은 커다란 두루마리에 감는데 실이 엉키지 않도록 한 뼘 만 큼 감길 때마다 뱁댕이를 댔다.

 날실에 풀칠을 메기는 이유는 바디가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하기 위함이다. 바디구멍 하나에 날실을 두 개씩 끼워서 양 발에 신은 베틀신끈을 바꿔가며 당겼다 밀었다 할 대마다 두 개의 날줄이 서로 반대로 움직여 아래위로 벌어지도록 장치하고 벌어진 날줄 사이로 북(씨실이 들어 있는 양복이 뾰쪽한 통)을 오른 쪽으로 밀어 넣었다가 왼 족으로 밀어 넣었다가를 되풀이하며 날실이 들어갈 때마다 바디(날실을 끼운 빗살 같은 틀)을 앞으로 당겨 쳐서 무명천을 짰다. 그 옷감을 짜는 소리는 또드락 딱’ ‘또드락 딱했다.

 어머니는 날마다 하루 종일 그리고 몇 달 동안 또드락 딱’ ‘또드락 딱무명 천을 짜셨다. 두루마리에 감겨 있는 날실이 끝날 때까지 짜셨다. 겨울이 되면 어머니는 이토록 고생해서 짠 무명천으로 내 솜 바지저고리를 만들어주셨다. 한 달만 입고 나면 옷 솜이 거의 흘러 내려 바짓가랑이 아래로 몰린다. 마치 똥이 뭉쳐 매달린 것 같아 똥 바지라고 했다.

 한겨울이 지나 옷에 때가 묻어 꾀죄죄한데다가 솜이 모두 흘러내려 홑저고리 홑바지를 입은 것 같이 아침저녁에는 추워서 떨며 지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돼도 그리고 여름이 가까워도 남루하고 찢어진 그 옷을 그대로 입고 다녔다. 한 여름이 되어서야 홑적삼 잠방이로 갈아입었다.

 4학년 때 겨울에는 어머니가 짠 무명천에 검정색 물감을 들여서 어머니가 손수 재봉질 해서 학생복을 한 벌 만들어 주신 적이 있다. , 여름, 가을은 거의 신발 없이 맨발로 다녔다. 그 당시에는 길에 돌이 많았다. 그래서 맨발로 걷거나 뛰다가 엄지발톱이 돌부리에 채이기 일수였다. 그러면 엄지발톱에 멍이 들었다가 한 동안 지나면 빠져나갔다. 간간히 게다(나무로 만든 슬리퍼)를 신고 다니면 게다 못이 복숭아 뼈를 스쳐서 늘 상처가 났고, 짚으로 샌들처럼 만든 와라지를 신으면 하루 만에 낡아서 버려야 했다

 겨울철에는 주로 짚신을 신고 다녔다. 그런데 짚신은 집신 뒤턱이 발 뒤 금치 위를 개겨 허물이 벗었다. 그래서 뒤턱을 찌그려 신고 다녔다. 검정색 고무신을 사 준적도 있었는데 아끼느라고 거의 신지 않았다.

 양말은 무명실로 떠서 겨울에만 신었다. 그런데 하루만 신고나면 뒤 금치는 구멍이 크게 나고 하루 더 신으면 앞 발바닥도 다 나가고 결국 양말 웃 등만 걸치고 다녔다. 어머니가 무명천으로 솜을 넣은 버선을 만들어 주시기도 했는데 이것도 양말처럼 금방 해져서 누더기만 신고 다녔다.

 

광복(光復)

 1945815, 대동아전쟁(2차세계대전)을 하고 있던 일본천황이 국제연합군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우리는 일본의 압박에서 해방이 되었다. 9월에 개학이 되어서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이 한 분만 계셨고 일본사람 미야다 교장도 없었다. 그리고 혼자 남은 선생님의 어머니가 우리 앞에 나와서 조선말로 일본의 압박에서 해방이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조선말을 써야 한다.’ 라고 조선말로 말씀하셨다.

 그런데 조선말 쓰는 것이 아주 어색하게 느껴졌다. 학교에 오면 일본말만 썼으니까. 학교에서는 일본말을 쓰는 것이 몸에 배서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이것은 내가 학교에서 일본식 황국신민교육을 받는 동안 반쯤은 일본사람이 되어 갔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5학년 2학기가 한참 지나서 처음으로 , , , ...’ ‘, , , ...’배웠다. 우리나라 글자를 처음으로 배운 것이다.

 

맺는 말

 이 글은 일제 말기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해서 1945년 해방이 될 때 까지 내가 겪었던 일본제국주의 황국신민교육의 생생한 모습과 나라를 빼앗긴 국민이 겪어야 했던 고통스러운 생활 모습의 구체적인 나의 경험을 기록한 것이다.

 나는 나의 이 생생한 경험을 미래 사회를 이끌어갈 학생들에게 간접으로나마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여 나라를 빼앗긴 국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고 호국의 의지를 키우는 데 일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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