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히 빛나는 안성인의 호국정신

이수봉 성균관 전학·하나원 강사



찬란히 빛나는 안성인의 호국정신

 

이수봉 성균관 전학·하나원 강사

 

 호국정신(護國精神)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분연히 일어나 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굳건히 지키고자 하는 정신을 일컫는다.

 안성은 예로부터 홍건적, 몽고족의 침입, 임진왜란, 일제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외침의 위협을 받아왔다.

 국난이 위협이 있을 때마다 굳건한 애국심과 나라를 지키려는 곧은 선비의 정신 하나로 민··군이 합심해 이를 단호히 물리친 호국정신이 충만한 충신과 열사의 고장이다.

 안성은 예로부터 찬란한 문화유산을 사랑해 온 고장이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에 소속된 정치·문화의 중심지 였으며, 고구려 시기에는 내혜홀이라 불렸으며, 신라가 이 지역을 병합한 이후 백성군으로 개명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오늘날 같은 안성(安城)이 되었다.

 안성이라는 지명은 안성군민들이 국난극복의 의지를 결연히 보여준 역사적 사건과 밀접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시 안성 백성들의 드높은 호국정신은 우리 역사상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질 때마다 남달리 뛰어났던 역사적 기록을 보면 알 수 잇다.

 고려시대의 여진족, 몽고족, 왜구의 침입은 많은 피해를 안겨주었는데 이러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분연히 일어나 커다란 공을 세우면서 나라를 구했다.

여진정벌때에는 안성인으로 이영, 박경인 등이 종군해 공을 세웠으며, 몽고의 침임 때는 박서 장군과 송문주 장군이 분연히 일어나 커다란 공적을 세웠다. 그리고 홍건적의 난입 때는 군민 전체가 항거해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때의 경우 많은 애국지사들이 나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기 하에서도 죽음을 불사하고 독립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236(고종23) 현재의 죽산 지역에 있는 죽주산성에서 몽고군을 맞아 보름 동안의 항전을 계속한 결과 마침내 몽고군을 퇴각시켰고, 1361(공민왕10)의 홍건적의 침입 때는 그당시 경기도 일대 여러 군현이 그들을 두려워하여 모두 항복하였으나 오직 안성 사람들은 꾀를 내어 적을 섬멸하였다.

 임진왜란때는 오정방(양성면 덕봉리), 김충수(고삼면 월향리), 이덕남, 홍계남(이상 서운면 양촌리)등의 의병장 주도하에 유격전을 펼쳐 여러 차례 승전하였다.

 한편 1919년에는 원곡, 양성 등에서 2000여명 규모의 조선독립 시위를 일으켰는데 그로인해 21명이 일본헌병에 의해 살해되었고, 120명이 구속되는 등 가장 많은 희생자를 기록하였으므로 학자들은 3.1만세 시위의 전국3대 실력항쟁지의 하나로 꼽고 있다.

 이어 김태원(죽산면 장계리), 이완구, 심광식(이상 안성읍)등은 독립운동 자금모금, 한국독립당 의용대장, 임시정부의 참여 동의 활동을 통해 일본제국주의 지배로부터 조선독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국난극복에 앞장섰던 안성인의 호국정신을 보면 고려시대 대몽항쟁 때의 박서 장군, 죽주성의 방호별감 송문주 장군, 고려말 안성 현인들의 활약상,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5위도총부 오정방 도사, 이덕남 장군, 홍자수 판의금부사와 그의 아들 홍계남 장군, 이인좌 난을 평정한 김만중 장군과 오명항 도 순무사, 그리고 일제 때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많은 우국애국지사들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족홍건족왜구의 침입 등 유난히 외적의 침입이 잦았다. 박서 장군은 죽주(지금의 죽산) 출신으로 고종 18년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귀주성을 30일간 굳게 지켰고, 또 나가 싸워 수많은 몽고군을 죽여 후에 문하평장사가 되었다.

 송문주 장군은 고종 23년 몽고군이 3차 침입했을 때 죽주성 방호별감으로 죽주산성에 웅거하면서 수 주일 동안 전투에서 적을 격퇴해 남진을 저지한 공로가 높다. 송문주 장군의 사당은 현재 죽산면 매산리 106번지에 있다.

 고려말 홍건적의 침입이 많았는데 1차는 공민왕 8년이며, 2차는 공민왕 1010월 홍건적이 개경까지 함락하자 왕은 복주(지금의 안동)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홍건적은 남진을 계속해 양광도(지금도 경기도)30여 주군을 차례로 점령했다.

 대부분 고을에서는 겁내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고, 심한 경우 고을에서는 홍건적 위세를 겁내어 자진 항복을 하기도 했다. 홍건적은 여세를 몰아 계속 남진해 안성지역에 도달했고, 안성현인들은 항복하는 척하며 잔치를 벌여 적군을 환영했고 술에 취한 장수들을 섬멸하니 적은 더 이상 남침하지 못한 채 퇴각하고 말았다.

 왕이 홍건적의 침입에 의연히 싸워 이긴 안성백성들의 충의와 호국정신을 표상하는 기념비로 극적류를 건립케 했다. 현재 봉산삼거리에 복원된 극적류는 안성인의 자랑인 전승누각이다.

 이덕남 장군은 임진란이 일어나자 외숙 홍자수가 의병장이 되어 안성에서 군사를 모집, 왜적과 항전하고 있을 때 합세해 의병을 지휘하고 싸웠다. 장군은 안성과 진천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서운산성에 성루를 구축하고 홍계남 장군, 이덕남 장군과 농기구를 녹여 무기를 만들어 조총을 쏘아대는 왜적과 싸우다가 안타깝게 전사했다.

 후에 충신의 정문이 내려졌고, 병조참의에 추중되었으며, 용맹하고 전략이 높은 홍자수 부친과 4형제가 함께 죽산, 양지, 용인 등지에서 왜적을 기습하거나 격퇴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오명항 선생은 이인좌 난이 일어나자 도순무사로 난을 평정해 분무공신 1등이 되었다. 후에 우의정에 승진했으며, 효성 또한 지극해 효자정문이 세워졌다. 김만중 장군은 오명항 도순무사와 함께 이인좌 난을 평정해 분무 이등공신이 되었으며, 그 후 충청도 수군절도사에 이르렀는데 영정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일제식민지 치하에서도 안성인의 호국정신은 계속되었다. 일제가 강제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전국적으로 수탈할 때 안성읍의 임근수, 김명기, 보개면의 강태영, 공도면 오인근, 양성면 오장환 등이 일진회 안성사무소를 습격해 파괴 시켰고, 평택역을 점거, 철로위에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다가 헌병수비대에 체포되어 많은 애국지사들이 총살당했다.

 31운동이 발발하자 41일 양성, 원곡에서 항쟁을 시작해 관공서와 일본인 상점을 불태우고, 파괴해 2일간의 해방을 쟁취했다. 31운동은 안성읍내와 죽산 지역으로 확산되어 많은 희생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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